사물적 성격
생닭 잡기에 빗대어
모든 예술품은 사물에 의존한다. 머리속에 있는 개인적인 관념이나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말 그대로 머릿속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외부로 현상시키는데 어떠한 매개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품은 재료로 쓰인 사물의 사물성이라는 한계를 분명히 갖는다. 그러나 예술품이 사물성의 한계를 갖으면서도 사물에 의탁함으로서 생기는 의도 이상의 의미가 생성되기도 한다. 재료로 쓰이는 오브제가 원래 갖고 있던 쓰임새나 의미가 예술품이 표현하고자 하는것에서 의도 이상의 미묘한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이에 빗대어 본다면 우리가 진행한‘생닭잡기’과제도 이 범위 내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받아 관찰한 생닭은 헌 옷이라는 사물(재료로써의)과 등호가 절대 성립될 수 없다. 다르게 얘기하면, 내가 헌옷을 형태적으로, 또 색감이나 질감까지 완벽히 재현한다고 해도 그것이 생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만든 닭이 가진 사물로써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관찰의 대상인 생닭 원형도 사물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닭에 어떠한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덧씌워 지지 않았기 때문에, 즉 예술적 성격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사물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생닭을 해부를 하면서까지 관찰하고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내가 만들어 내는 헌옷생닭은 생닭이 될 수 없다. 옷이 가진 사물적 성격 ‘탓’에 완벽한 재현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사물이 갖는 성격의 한계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사물적 성격이 한계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기에 드러낼 수 있는 미묘함도 갖는다. 여기서 나는 미묘함이 일련의 치환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닭의 요소들이 천의 요소로 치환된다. 치환의 과정에서 만든이의 개인적 기호와 규칙이 개입이 되고 이것이 원본 대상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조금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예술품의 사물적 성격이 명료한 한계를 갖게 하면서도 어떤 초월성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원본 대상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재료사이의 괴리에서 분명한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요소들은 개인의 표현이나 의도에서 발생하고 그것들은 또 보는이에게 대상과는 다른 어떤 뉘앙스를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이다. 재료로 쓰인 오브제의 원래 쓰임새나 텍스쳐 자체의 질감 등이 자꾸 대상의 원래 성격과 충돌하면서 재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일종의 뉘앙스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물적 성격이 가진 초월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이 가진 이러한 요인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대상의 완벽한 재현이 아닌 사물로써의 한계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환의 과정에서 어떠한 선택을 함으로써 어떠한 시각적인, 혹은 개념적인 효과를 거둘 것인가’ 라는 것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재료의 선정부터 표현의 방법적인 면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패브릭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이런 관계를 생각하며 선택하게 된다. 생닭과 최대한 비슷한 패브릭이 아닌 스스로의 의도나 표현의지를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패브릭을 고를것이다. 또, 재료로써의 사물이 갖고 있는 특성이라던가 천의 촉감, 시각적 촉감, 패브릭의 빳빳함 등 여러 요소를 생각하는데 의도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재료를 고른뒤 내가 파악한 내,외부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치환하여 표현해 낼 것인가를 생각하며 재료에 가장 적절한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후에 우리는 각자 고른 천의 특징을 고려하여 생닭아닌 생닭, 혹은 천으로 만들어진 ‘생닭 모양의 어떤 것’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발생한다. 우리가 만든것은 결코 닭이 아니다. 헌 옷과 닭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닭이라고 인식한다. 어떻게 이런 착오가 발생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형태적인 유사함이 가장 큰 요인로 작용할 것이다. 전혀 다른 A가 B의 모습을 취할 때, 그것의 성질이 같지 않으나 우리는 A를 B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쓰레기 더미가 벽에 비친 그림자가 제한된 형태의 실루엣으로만 형상을 만들면 우린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헌 옷으로 만든 닭이 헌 옷 뭉텅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닭의 구조와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닭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형태적인 유사성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근골격의 구조를 자신만의 단일된 유닛으로 설정(minimalize)한 닭에서는 원본 대상으로 인식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데, 미니멀라이징 시켜 놓은 닭에서도 원본 대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본 이상의 좀 더 넓은 범위를 인식 가능하게 하는 부분도 있다. 구조적인 표현이 생략되거나 표면적인 질감들이 전혀 원래 대상의 질감과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닭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사물이 가진 본래의 한계가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예술품이 사물을 재료로 취함으로써 갖게 되는 사물성의 특징이다. 대상의 재현이 아닌 어떠한 치환의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개인적 해석, 혹은 이것의 형태적인 요소들이 최소화 되면서 생기는 틈새들을 작품의 사물적 성격이 메워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결여되는 틈새에서 단순한 원본의 모습이 아닌 생략에서 느껴지는 원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사물이 재현의 차원에서 갖는 명료한 근원적 한계가 보는이에게 상상과 유추라는, 그리고 전혀 다름에서 용인되는 지점들에서 발생하는 재미라는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품은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자기가 갖는 사물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저장 가능한 결과물로 남는 작업은 당연하고 퍼포먼스나 해프닝, 사운드 작업 같이 순간성을 지닌 예술 작업들 또한 사물적 성격이라는 태생적 특성에 반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이 품고 있는 사물적 특성이, 예술적 특성을 부여할 때에 의도 이상의 시너지를 생성하는 특성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예술품을 볼 때, 사물이라는 명료한 범주에 스스로 제한되지만 그 제한됨이 초월성을 갖게해주는 긍정적인 아이러니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